처음 유럽 여행 일정을 계획할 때, 많은 도시를 넣고 싶은 욕심이 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후 깨달았다. 더 많이 보는 게 아니라 더 깊이 느끼는 게 진짜 여행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딱 세 나라만을 천천히 여행하기로 했다. 각 도시에서 최소 3~5일 머물며 골목과 광장, 시장과 언덕을 직접 걸으며 그 나라의 공기와 리듬에 스며들었다. 낯선 곳에서 낯익은 감정을 느끼는 그 순간들이, 짧은 15일 여행을 더욱 진하게 만들었다. 많은 관광지를 빠르게 돌기보다는 적은 도시를 오래 걷는 여행. 그것이 이번 유럽 여행에서 내가 선택한 방식이자, 여행을 좋아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
로마와 피렌체, 예술과 유적의 진짜 매력을 느끼다
유럽 첫 여행이라면 흔히 여러 도시를 다다다다 찍고 오는 일정을 많이들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도시 수를 줄이고 체류 시간을 늘리는 쪽을 선택했다. 그 시작은 이탈리아였다. 로마에서 첫 발을 내딛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고대 로마 유적들이 현실감 없이 다가왔다. 콜로세움은 기대보다 더 거대했고, 바티칸 박물관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은 실제로 목이 아플 만큼 올려다보게 만들었다. 로마는 그렇게 하루하루를 "역사와 걷기"로 채웠다. 단지 유명한 관광지를 찍는 것이 아니라, 구글맵이 안내하지 않는 작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마주친 현지인의 작은 카페와 오래된 서점이 더 인상적이었다. 피렌체에서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본 순간 눈물이 찔끔 났다. 단지 조각이 아닌, 생명 같은 실루엣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감동받았던 순간은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맞이한 피렌체의 일몰이었다. 여름의 해는 늦게 지고, 주황빛 노을 아래 두오모 대성당의 실루엣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남았다.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를 스치듯 지나가지만, 6일 동안 로마와 피렌체 두 도시만을 천천히 걸으며 다녔기에 그 감동이 배가되었다. 특히 피렌체에서 와이너리 반일 투어에 참여했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토스카나 언덕 사이를 달리는 차 안에서 잔잔한 음악을 들으며 바라본 해바라기 들판은, 사진보다 마음에 더 선명하게 남아 있다. 이런 일정 덕분에 하루 일정을 끝내고 숙소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을 충분히 즐길 여유도 생겼다.
스위스에서 걷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이동한 날, 루체른 기차역에 내리자마자 확 바뀐 공기의 냄새와 풍경이 인상 깊었다. 사람보다 자연이 더 말을 거는 나라라는 느낌이었다. 루체른은 조용하면서도 단정했고, 호수 주변의 산책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본질을 깨닫게 했다. 한국에서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있지만 스위스에서는 '그냥 걷는 것'이 목적이 된다. 카펠교와 무제크 성벽, 리기산 열차 등 루체른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진짜 하이라이트는 인터라켄이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그 작은 마을은 마치 포스트잇처럼 내 일상에 부착되고 말았다. 융프라우요흐에 올랐을 때, 주변의 언어가 다 사라지고 눈 앞에 펼쳐진 순백의 설원이 압도했다. 자연을 보면서 오히려 내 안의 소음이 줄어드는 느낌, 그것이 스위스에서만 가능한 감정이었다. 누군가는 스위스를 비싸다고 하지만, 그만한 값어치를 확실히 했다. 치즈 퐁듀와 초콜릿을 곁들인 저녁은 한 끼에 5만 원이 넘었지만, 아무런 후회 없이 완벽했다. 도시가 아닌 ‘풍경’을 소비하고 싶은 여행자라면, 스위스는 필수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곳을 돌지 않아도, 한 곳의 하늘과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기억이 된다. 루체른과 인터라켄 두 곳만으로도 나는 스위스를 깊이 경험했다고 자신할 수 있다. 한 가지 팁을 더하자면, 스위스는 기차가 매우 정확하고 쾌적하기 때문에 Eurail 패스를 활용해 이동과 풍경 감상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특히 인터라켄으로 향하는 기차 창밖에 보이는 라우터브룬넨 폭포는 마치 동화책 속 장면을 그대로 꺼내놓은 듯 했다. 물가가 높다는 단점도 있지만, 자연이 주는 위로는 가격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파리에서의 4일, 화려함 속의 느림을 배운 시간
유럽 마지막 도시는 파리였다. 스위스의 자연에서 도시로 넘어오니 처음엔 낯설었지만, 곧 파리만의 고유한 리듬에 녹아들었다. 에펠탑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샴페인 한 잔, 샹젤리제 거리를 걷다가 들른 라뒤레에서 마카롱 하나. 파리는 바쁘지만, 이상하게 여유롭다. 루브르 박물관은 말할 것도 없고, 오르세 미술관은 생각보다 감성적이었고, 세느강 유람선은 낮보다 밤이 더 아름다웠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았던 곳은 몽마르트르 언덕이다. 여유로운 시간이 많았기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에 앉아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거리를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었다. 마지막 날엔 베르사유 궁전을 반나절 다녀왔다. 웅장한 정원과 대리석 홀을 걸으며 유럽의 왕실이 왜 그렇게 호화로웠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보통 파리는 2박 정도만 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이곳에 3박 4일을 할애했다. 그 덕분에 진짜 파리를 보았다고 느낀다. 쇼핑이 목적이 아닌, 그 도시의 ‘공기’를 느끼는 여행이 진짜였다. 파리는 그 공기가 매력적인 도시다. 특히 오후 5시쯤 센 강 근처의 카페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며 마신 따뜻한 카페 크렘 한 잔은 오랜 여운을 남겼다. 도시가 주는 여유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바쁘게 움직이기보다 한 템포 느리게, 도시를 온전히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파리는 꼭 3박 이상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밤에 에펠탑이 반짝이는 순간, 그 앞에서 내가 여행 중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