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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기차여행: 대륙 횡단의 낭만(설렘,풍경,소통)

by 하빛나 202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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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단숨에 도착하는 도시 여행, 렌터카로 떠나는 로드트립, 배낭 하나 메고 걸어 다니는 오지 탐험. 그런데 내가 이번에 선택한 방식은 그 어느 것과도 다른, 느리지만 특별한 여정이었다. 바로 철도를 타고 유럽과 아시아를 횡단하는 유라시아 기차여행.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닌, 이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여행. 매일 바뀌는 풍경 속에서 나를 되돌아보고, 낯선 이들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 지금부터 그 느림의 미학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자.

유라시아 기차여행에 관한 사진

1. 출발의 설렘,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 기차여행을 결심하게 된 건 평소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잇는 거대한 대륙을 직접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시베리아 횡단열차’라는 이름만으로도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이 노선은,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라는 상징성까지 갖고 있어 그 자체로 로망이었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약 9,200km를 7박 8일에 걸쳐 달리는 여정을 선택했다. 항공편으로 모스크바까지 이동하고, 열차 티켓은 2등석(쿠페 기준)으로 약 450~500달러 수준이었다. 총경비는 항공료를 제외하고 약 100만 원 정도를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식비와 기차 안에서 구매한 간식, 중간 기착지 투어 등을 포함해 120만 원 정도가 들었다. 처음 모스크바 야로슬랍스키 역에서 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 내 앞에 펼쳐질 수천 킬로미터의 길이 전혀 실감 나지 않았다. 하지만 창밖으로 펼쳐지는 너른 평원과 자작나무 숲, 그리고 중간중간 멈춰 서는 시골 마을들의 풍경을 보고 있자면, 이 기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는 거대한 여행의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기차 안에서 먹는 뜨거운 라면 한 그릇, 낯선 승객과 나누는 짧은 대화들조차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

2.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달리는 차창 밖의 풍경들

유라시아 기차여행의 백미는 역시 창밖으로 펼쳐지는 장엄한 자연이다. 모스크바를 지나고 하루 이틀쯤 지나면 본격적인 시베리아의 풍광이 시작되는데,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 숲과 툰드라 지대, 그리고 드물게 나타나는 작은 마을들이 반복된다. 어느 순간부터는 해가 뜨고 지는 시간조차 알 수 없을 만큼 기차에 몸과 감각이 적응하게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순간은 바이칼 호수 근처를 지날 때였다. 창밖으로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고, 잠시 기차가 멈췄을 때 내려서 호수 바람을 맞아보았다. 한 손엔 현지에서 산 훈제 생선(약 300 루블), 다른 손엔 따끈한 홍차. 그 조합은 지금도 내 입 안에 기억으로 남아있다. 기차는 느리지만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내 마음도 그 속도에 맞춰 천천히 가라앉는다. 책을 읽다 말고 풍경을 보다가, 졸다 깨어서 일기 한 줄을 적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차곡차곡 쌓여간다. 하루 2~3끼의 식사는 주로 역 근처에서 산 도시락이나 열차 안에서 끓여 먹는 간편식으로 해결했고, 전체 식비는 약 15만 원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3. 낯섦 속의 소통, 기차 안의 특별한 인연들

장거리 기차여행의 묘미는 같은 칸에 탄 승객들과 나누는 소소한 인연에서도 빛난다. 처음에는 말도 통하지 않고 낯설기만 하던 러시아인 승객들과, 함께한 시간이 쌓일수록 묘한 유대감이 생겼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노보시비르스크 근처에서 탑승한 한 러시아 할머니였다. 처음엔 말이 통하지 않아 눈빛으로 대화를 했지만, 그녀가 직접 싸 온 빵과 피클을 나눠주며 내가 가져간 한국 과자를 건네는 사이 자연스럽게 마음의 거리가 좁혀졌다. 어느 날은 기차 안에서 작은 생일파티도 열렸다. 다른 승객이 생일이라고 하자 옆 칸에서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직접 만든 사탕을 돌렸다. 그런 순간들이 기차 안을 하나의 작은 마을처럼 느끼게 했다. 이질적이었던 문화가 하나의 공간에서 조화를 이루고, 모두가 잠시 같은 속도로 인생을 여행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라시아 기차여행은 단순히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 마음속의 속도를 다시 설정하고, 세상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여정이었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기차의 흔들림이 몸에 남아 있는 듯했고, 나는 그 여운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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